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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7일 목장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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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새새
댓글 0건 조회 11회 작성일 25-10-11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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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님들의 섬김을 감사합니다.
이제 태신자 작정이 10월 마지막 주 26일 주일에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기도와 목장에서 독려를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성품 배우기 – 정직

본문 – 사도행전 5장 1 – 11절

 

옛날에는 배우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연극에서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맡습니다.

그럴 때는 목소리도 바꾸고 얼굴도 바꾸어야 합니다.

이때 가면을 쓰고 나옵니다.

한 사람이 주인의 행세도 하고 종의 행세도 합니다.

좋은 사람의 행세도 하고 나쁜 사람의 행세도 합니다.

이러한 가면 배우들을 히포크? 위선자라 불렀습니다.

 

근데 여러분, 이런 의미에서의 위선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한 배우가 여러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근데 오늘 본문에는 정말 위선의 삶을 산 한 부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부부는 아나니야와 삽비라입니다. 1절에서 3절입니다.

 

아니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아니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여기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한 말? 3절 하 반절요?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이 말을 잘 보셔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실은 이때가 초대 교회에 폭포수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였습니다.

그때 이들은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아니하고 한마음 한뜻이 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사도행전 4장 3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이렇게 서로 마음을 같이 하고 서로 사랑을 나눔이 충만할 때 그걸 그냥 보지 못하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단입니다.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사단이 이 세상이 자기 세상으로 알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로 생긴 교회 공동체로 자기 세상이 완전히 박살이 나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교회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이 세상에 폭포수같이 임하게 되자 사단의 세력은 급격하게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이 은혜의 폭포수를 막는 법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강력하기도 하지만 아주 예민하기도 한 것이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것이 들어오게 되면 이 은혜의 폭포는 끊어지게 됩니다. 또 누군가가 죄를 짓고 감추거나 혹은 위선이 들어와도 이 폭포는 중단되게 됩니다.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이 그야말로 폭포수 같이 임했습니다.

근데 그 하나님의 폭포수 같은 은혜를 하루아침에 멈추게 하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것은 아이 성 전투였습니다.

여리고에 비해 십 분의 일도 안 되는 작은 성인데 그 전투에서 대패를 하게 됩니다. 그 이유가 뭔가? 두 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는 지난 오후 예배 때 살펴본 것처럼 자기 소견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 견고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후 저 정도쯤의 성이야? 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도 않고 진격하다가 대패한 것입니다.

교만한 거지요.

 

두 번째는 아간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여리고 성에서 취해서는 안 되는 금덩어리와 은덩이와 외투를 감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폭포수 같이 내리던 은혜가 중단되어 버렸습니다.

 

근데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런 의문이 생기지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왜 재산을 다 바치지 않고 반만 바친 것이?

그렇게 큰 죄인가? 죽을 정도로 큰 죄인가?

그리고 왜 이것이 성령을 속인 죄인가? 의문이 갈 것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계획적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사도들의 칭찬과 성도들의 인정을 받으려 했던 겁니다.

즉 자신은 바나바처럼 살 마음도 없으면서 남에게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만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겁니다. 사람의 눈만을 의식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기보다 자신의 체면을 중요시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을 무서워해야 합니다.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들은 하나님이 귀머거리인 줄 알았습니다.

아무것도 못 보는 소경으로 알았습니다.

저 먼 하늘에 계셔서 자신들이 하는 행동을 모르는 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습니까?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감찰하고 계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사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는 성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들이 계획하고 행한 행위는 처음부터 의도가 순수하지 못했고 성령을 속인 행위이기 때문에 비판받고 정죄 받아야 마땅한 행위였던 겁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이 위선적인 사건이 비단 한 부부의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별것 아닌 하나의 죄가 교회에 쏟아지고 있는 폭포수 같은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무서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아주 사소한 위선이나 죄가 얼마든지 성령의 역사를 소멸시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꺼진 성령의 불길을 다시 회복시키려면 가슴을 찢는 고통스러운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차라리 아나니아가 이것은 제 재산의 반입니다.

바나바 같은 믿음이 없어서 전부 바치지는 못하고 이것밖에 바치지 못합니다.

너무나도 부끄럽지만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했더라면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축복받을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왜 성령을 거슬리며 거짓말을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아나니아를 죽게 하려고 이 책망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이 베드로의 책망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에 큰 충격을 가져다준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근데 더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른 채 그의 부인인 삽비라가 이 일이 있은 세 시간 후에 나타난 것입니다. 7절이지요.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자기 남편이 죽고 온 교회가 발칵 뒤집어 졌는데도 부인은 아무것도 모르고 세 시간이 지난 후에 교회에 나타났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삽비라에게도 묻습니다.

 

이 바친 재산이 전부냐? 삽비라가 대답합니다. 이것밖에 없습니다!

이때 또 베드로의 무서운 책망이 이어집니다. 9, 10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매어 내가리라 하니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여러분, 부부는 돕는 배필입니다.

이 돕는 배필은 죄를 짓는데 돕는 배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누구 한 사람이 죄를 지으려 해도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고

어느 한쪽이 시험에 들었을 때도 붙들어 주어서 그 시험에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정으로 돕는 배필이 할 일일 겁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함께 한 통속이 되어 죄를 지을 때 살길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초대 교회에 있어서 너무나도 큰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슬픈 일이었습니다.

 

교회가 은혜 가운데서 마냥 사랑하고 축복하고 화합함으로 나아가는 부흥이 불길이 타오르는 그 시점에

한 부부의 그릇된 행동이 부흥의 불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만약 요즘에도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치신다면 아마 교회에서 죽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사 하나님께서 지금은 우리를 이러한 것으로 바로 쳐서 죽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죽을 죄인임을 자각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할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조금의 거짓이나 위선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을 속이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 일을 교훈 삼아 그들이 위선과 거짓을 제거했을 때 더 많은 기적과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14절에서 16절을 보십시오.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교회에 위기가 발생했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나 말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마십시오.

교회가 이것을 전화위복으로 삼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올바르게 설 때 하나님께서는 더 큰 능력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도 성령의 폭포수 같은 은혜가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이 없어야 합니다. 모든 거짓과 위선은 하나님 앞에 다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 큰 성령의 은혜 폭포수같이 임하여서 많은 병자들이 낫고 구원받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교회를 함께 만들어가는 저와 여러분들 다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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