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 목장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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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목자들의 섬김에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
성령님과 함께 일상을!
본문 – 요한복음 14장 25 –27절
에베소서 2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여기 만드신 바는 헬라어로 포이에마입니다.
이 단어는 영어 단어 시를 뜻하는 포엠에서 발생했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포이에마?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시 같은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릴 때 어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시인이 아니었던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날아가는 새만 봐도 신기한 감수성이 예민한 시인의 감성이 우리에게 다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시 쓰기를 멈추었는가?
언제부터 아름다운 시가 나오던 입술에서 원망과 분노가 나오는 인생이 되게 된 것입니까?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하나님의 시 같은 아름다운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무슨 일로 이것들이 중단되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적인 입장에서 미숙한 나 자신을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일상의 삶에서 성령을 얼마나 의식하며 사십니까?
일반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은 삼위일체를 믿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매 주일 사도신경을 암송하면서 성령을 믿사오며 라고 고백합니다.
교인들은 성령이 인격체이심을 믿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근데 그런 고백을 하면서도 누가 성령을 말하면 경직됩니다.
성령의 역사, 성령의 인도, 성령의 기름 부으심? 이런 말들을 들으면 마치 아주 잘못된 신앙관을 가진 광적인 신자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도록 일부 목회자와 성도들이 원인을 제공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을 말하면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는 주체자로 보기보다 현상을 강조했고 열매보다는 은사나 능력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성령을 받았습니까?
또는 성령이 여러분 안에 계십니까?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이 망설여지는 분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을 특별한 은사나 능력이 있다는 말로 이해하거나 성령이 그 사람 안에 있다는 말을 성령과의 신비한 체험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성령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에 하셨으리라 짐작되는 말씀 가운데 특히 성령에 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주님이 성령에 관해 말씀하시며 강조한 것은 주님이 비록 세상을 떠나가시지만 제자들만 두고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 같이 이제 아들이 가면 아들과 함께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해 보았습니다.
지금부터 한 20년 전에 조기유학 붐이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엄마가 아들을 설득합니다.
앞으로 너가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 경쟁이 더 심할 건데 영어는 필수가 될 것이다!
너의 장래를 위해 미국으로 가는 게 좋겠다! 그러니 미국에 있는 이모 집으로 가자!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도 어린 아들은 모든 게 혼란스럽고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함께 있으니 괜찮습니다. 미국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엄마가 아들에게 다짐을 시킵니다.
엄마가 여기 있어도 좋지만 너를 위해서는 엄마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이모는 미국에 오래 살았고 너를 사랑하니까 잘 돌봐 줄 거야! 힘들더라도 이모 말 잘 듣고 엄마가 다시 올 때까지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어린 아들을 두고 혼자 떠나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프지만 미국 생활을 위해서는 이모에게 맡기는 것이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헤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아들이 참 안쓰럽습니다.
어린 아들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너무 불안하고 무섭기도 하고 어안이 벙벙하기도 합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이모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엄마도 아들이 안쓰럽기는 하지만 이모가 잘 돌봐 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아들을 미국에 남겨둔 채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엄마를 떠나보내는 어린 아들은 이모 손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너무 무서워서 엉엉 울었지만 이모는 정말 엄마처럼 잘 돌봐 주었습니다.
저는 이 비유가 제자들을 두고 떠나시는 주님의 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방금 애기한 것을 조기 유학생의 심정이나 엄마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1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오늘 본문 26절도 보십시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6장으로 가서 7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여러분, 주님이 이 말씀들을 통해 소개하는 성령은 어떤 분입니까?
자신을 대신해서 제자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길을 인도하고 지키실 인격체로 소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을 인격체라고 말할 때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인격적 실존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곁에 계셔서 그들과 함께 애기하고 훈계하고 위로하시던 것과 같은 일을 하실 분이 제자들과 함께 있을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임재를 느낄 수 있던 없던 이것은 주님의 확실한 약속입니다.
제자들은 정말 두려웠습니다. 주님이 떠나가신다면 그들은 오합지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3년 동안 주님과 함께 다니면서 그들은 주님이 없는 시간을 상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힘들고 억울하고 속이 상해도 주님이 곁에 계시기 때문에 든든하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근데 이제 주님이 떠나가신답니다.
불안해 죽겠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주신 위로의 말씀은 나는 가지만 나를 대신할 보혜사가 와서 너희를 도와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보혜사로 번역된 이 단어는 도움을 주는 자? 위로자? 대변인 등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여러 의견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들과 함께 할 인격체라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약속하신 실제입니다.
제자들은 그 약속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저라도 믿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돌아가신 후 심지어 부활의 모습을 목격한 후에도 방황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더라도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완전히 달라진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체험한 후였습니다.
신기한 체험을 했기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기적을 보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런 거라면 주님 생전에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성령을 통해 그들이 경험한 것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성령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었지만 주님이 약속하신 데로 인격체이신 성령께서 그들 각각의 사람들과 함께해 주심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며 진지하게 생각해 봤습니다.
성령이 인격체라는 사실을요? 이게 무슨 뜻일까?
비록 제가 여러분들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생생하게 느끼고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성령 하나님은 분명히 저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와 여러분 안에 계셔서 때론 우리를 책망하시고 때로는 위로하시고 때로는 필요한 힘을 주십니다.
비록 우리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만 성령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멀리 계신 분이 아닙니다.
보혜사를 보내 주겠다는 위로가 주님을 떠나보내는 제자들에게 그렇게 큰 위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들이 이 세상을 마감하면서 할 수 있었던 고백은 약속대로 성령께서 함께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것은 더할 수 없이 큰 위로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도우실 것이며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실 겁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그 선하신 계획대로 우리에게 필요한 힘을 주시며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성령님의 인도를 갈망하는 겁니다.
그분의 다스림을 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 마지막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절제입니다.
이 절제가 헬라어로 엔 크라테이아 인데 앤이라는 접두어와 힘, 가능성이라는 크라토스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를 직역하면 통치자의 영역 안에 있음이라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이전에 알고 있는 자기 스스로 통제하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실은 통치자의 영역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참 의외이지요.
여러분, 이것은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내가 통치자 되신 성령님 안에 거할 때 그분과 함께 살아갈 때 비로소 절제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시 시대가 폭력과 타락이 난무하고 자기 통제와 절제가 안 되는 불행한 세대가 되고 만 것 역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기를 거부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절제는 자기 자신을 성령님의 인도, 다스림 안에 둘 때 비로소 행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은 부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 녹음기를 틀어놓고 한 번 서로가 하는 말을 녹음해 보십시오.
다시 들어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주옥같은 메시지가 부부싸움 가운데 담겨 있을 겁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부부싸움 할 때 틀린 말? 잘못된 말을 해서 상대방을 격분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쌍방 간에 다 옳은 이야기를 합니다.
근데 그것이 성령님의 영역 아래 있지 않고 절제라는 그릇에 담기지 않으니까 우리가 던지는 그 옳은 말에 상대방이 상처를 받는 겁니다.
즉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태도에 배우자가 상처를 받는 겁니다.
근데 그게 어떻게 절제뿐이겠습니까?
모든 영역에서 성령의 다스림, 통치가 필요합니다.
성령님과 함께 일상을!
본문 – 요한복음 14장 25 –27절
에베소서 2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여기 만드신 바는 헬라어로 포이에마입니다.
이 단어는 영어 단어 시를 뜻하는 포엠에서 발생했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포이에마?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시 같은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릴 때 어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시인이 아니었던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날아가는 새만 봐도 신기한 감수성이 예민한 시인의 감성이 우리에게 다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시 쓰기를 멈추었는가?
언제부터 아름다운 시가 나오던 입술에서 원망과 분노가 나오는 인생이 되게 된 것입니까?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하나님의 시 같은 아름다운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무슨 일로 이것들이 중단되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적인 입장에서 미숙한 나 자신을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일상의 삶에서 성령을 얼마나 의식하며 사십니까?
일반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은 삼위일체를 믿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매 주일 사도신경을 암송하면서 성령을 믿사오며 라고 고백합니다.
교인들은 성령이 인격체이심을 믿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근데 그런 고백을 하면서도 누가 성령을 말하면 경직됩니다.
성령의 역사, 성령의 인도, 성령의 기름 부으심? 이런 말들을 들으면 마치 아주 잘못된 신앙관을 가진 광적인 신자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도록 일부 목회자와 성도들이 원인을 제공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을 말하면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는 주체자로 보기보다 현상을 강조했고 열매보다는 은사나 능력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성령을 받았습니까?
또는 성령이 여러분 안에 계십니까?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이 망설여지는 분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을 특별한 은사나 능력이 있다는 말로 이해하거나 성령이 그 사람 안에 있다는 말을 성령과의 신비한 체험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성령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에 하셨으리라 짐작되는 말씀 가운데 특히 성령에 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주님이 성령에 관해 말씀하시며 강조한 것은 주님이 비록 세상을 떠나가시지만 제자들만 두고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 같이 이제 아들이 가면 아들과 함께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해 보았습니다.
지금부터 한 20년 전에 조기유학 붐이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엄마가 아들을 설득합니다.
앞으로 너가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 경쟁이 더 심할 건데 영어는 필수가 될 것이다!
너의 장래를 위해 미국으로 가는 게 좋겠다! 그러니 미국에 있는 이모 집으로 가자!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도 어린 아들은 모든 게 혼란스럽고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함께 있으니 괜찮습니다. 미국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엄마가 아들에게 다짐을 시킵니다.
엄마가 여기 있어도 좋지만 너를 위해서는 엄마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이모는 미국에 오래 살았고 너를 사랑하니까 잘 돌봐 줄 거야! 힘들더라도 이모 말 잘 듣고 엄마가 다시 올 때까지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어린 아들을 두고 혼자 떠나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프지만 미국 생활을 위해서는 이모에게 맡기는 것이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헤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아들이 참 안쓰럽습니다.
어린 아들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너무 불안하고 무섭기도 하고 어안이 벙벙하기도 합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이모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엄마도 아들이 안쓰럽기는 하지만 이모가 잘 돌봐 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아들을 미국에 남겨둔 채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엄마를 떠나보내는 어린 아들은 이모 손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너무 무서워서 엉엉 울었지만 이모는 정말 엄마처럼 잘 돌봐 주었습니다.
저는 이 비유가 제자들을 두고 떠나시는 주님의 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방금 애기한 것을 조기 유학생의 심정이나 엄마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1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오늘 본문 26절도 보십시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6장으로 가서 7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여러분, 주님이 이 말씀들을 통해 소개하는 성령은 어떤 분입니까?
자신을 대신해서 제자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길을 인도하고 지키실 인격체로 소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을 인격체라고 말할 때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인격적 실존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곁에 계셔서 그들과 함께 애기하고 훈계하고 위로하시던 것과 같은 일을 하실 분이 제자들과 함께 있을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임재를 느낄 수 있던 없던 이것은 주님의 확실한 약속입니다.
제자들은 정말 두려웠습니다. 주님이 떠나가신다면 그들은 오합지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3년 동안 주님과 함께 다니면서 그들은 주님이 없는 시간을 상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힘들고 억울하고 속이 상해도 주님이 곁에 계시기 때문에 든든하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근데 이제 주님이 떠나가신답니다.
불안해 죽겠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주신 위로의 말씀은 나는 가지만 나를 대신할 보혜사가 와서 너희를 도와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보혜사로 번역된 이 단어는 도움을 주는 자? 위로자? 대변인 등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여러 의견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들과 함께 할 인격체라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약속하신 실제입니다.
제자들은 그 약속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저라도 믿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돌아가신 후 심지어 부활의 모습을 목격한 후에도 방황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더라도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완전히 달라진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체험한 후였습니다.
신기한 체험을 했기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기적을 보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런 거라면 주님 생전에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성령을 통해 그들이 경험한 것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성령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었지만 주님이 약속하신 데로 인격체이신 성령께서 그들 각각의 사람들과 함께해 주심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며 진지하게 생각해 봤습니다.
성령이 인격체라는 사실을요? 이게 무슨 뜻일까?
비록 제가 여러분들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생생하게 느끼고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성령 하나님은 분명히 저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와 여러분 안에 계셔서 때론 우리를 책망하시고 때로는 위로하시고 때로는 필요한 힘을 주십니다.
비록 우리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만 성령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멀리 계신 분이 아닙니다.
보혜사를 보내 주겠다는 위로가 주님을 떠나보내는 제자들에게 그렇게 큰 위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들이 이 세상을 마감하면서 할 수 있었던 고백은 약속대로 성령께서 함께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것은 더할 수 없이 큰 위로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도우실 것이며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실 겁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그 선하신 계획대로 우리에게 필요한 힘을 주시며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성령님의 인도를 갈망하는 겁니다.
그분의 다스림을 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 마지막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절제입니다.
이 절제가 헬라어로 엔 크라테이아 인데 앤이라는 접두어와 힘, 가능성이라는 크라토스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를 직역하면 통치자의 영역 안에 있음이라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이전에 알고 있는 자기 스스로 통제하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실은 통치자의 영역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참 의외이지요.
여러분, 이것은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내가 통치자 되신 성령님 안에 거할 때 그분과 함께 살아갈 때 비로소 절제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시 시대가 폭력과 타락이 난무하고 자기 통제와 절제가 안 되는 불행한 세대가 되고 만 것 역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기를 거부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절제는 자기 자신을 성령님의 인도, 다스림 안에 둘 때 비로소 행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은 부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 녹음기를 틀어놓고 한 번 서로가 하는 말을 녹음해 보십시오.
다시 들어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주옥같은 메시지가 부부싸움 가운데 담겨 있을 겁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부부싸움 할 때 틀린 말? 잘못된 말을 해서 상대방을 격분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쌍방 간에 다 옳은 이야기를 합니다.
근데 그것이 성령님의 영역 아래 있지 않고 절제라는 그릇에 담기지 않으니까 우리가 던지는 그 옳은 말에 상대방이 상처를 받는 겁니다.
즉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태도에 배우자가 상처를 받는 겁니다.
근데 그게 어떻게 절제뿐이겠습니까?
모든 영역에서 성령의 다스림, 통치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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